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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이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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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야마 이와오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공신이며, 이후 일본 제국 육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보신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주요 전쟁에서 활약하며 일본 육군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만주군 총사령관으로 일본군의 승리를 이끌어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내대신을 역임했으며, 1916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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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이와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야마 이와오
오야마 이와오 (러일 전쟁 후)
정보
존칭 접두사종1위
원수 공작
이름오야마 이와오
원어 이름 (언어)ja
직위
내대신제4대
재임 시작1915년 4월 23일
재임 종료1916년 12월 10일
군주다이쇼
이전후시미 사다나루 친왕
이후마쓰카타 마사요시
육군대신초대 및 3대
군주2메이지
임기 시작21885년 12월 22일
임기 종료21891년 5월 17일
이전2직위 신설
이후2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임기 시작31892년 8월 8일
임기 종료31896년 9월 20일
이전3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이후3다카시마 도모노스케
문부대신임시 겸임
내각구로다 내각
임기 시작31889년 2월 16일
임기 종료31889년 3월 22일
대경시제2대
임기 시작41879년 10월 16일
임기 종료41880년 2월 28일
임기 시작51895년8월 5일
임기 종료51907년9월 20일
1907년9월 21일
임기 종료61916년12월 10일
임기 시작41882년 9월 4일
임기 종료41884년 2월 13일
이전4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후4야마가타 아리토모
임기 시작51889년 5월 16일
임기 종료51904년 6월 20일
이전5가와카미 소로쿠
이후5야마가타 아리토모
임기 시작61905년 12월 20일
임기 종료61906년 4월 11일
이전6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후6고다마 겐타로
생애
출생일1842년 11월 12일
출생지가고시마, 사쓰마 번 (현재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사망일1916년 12월 10일
사망지도쿄, 일본 제국
군사 복무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68년–1914년
계급[[파일:元帥徽章.svg|20px]] 원수
참전 전투보신 전쟁
우쓰노미야 성 전투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여순항 전투
웨이하이 전투
평양 전투
러일 전쟁
랴오양 전투
사허 전투
산데푸 전투
봉천 전투
훈장
훈장국화장 경식
욱일동화대수장
금치훈장 (1등)
메리트 훈장
가족
친척사이고 다카모리 (종형)
사이고 주도 (종제)
요시이 도모자네 (장인)
야마카와 히로시 (처남)
야마카와 겐지로 (처남)
야마카와 후타바 (처제)
이다 반난 (사위)
오야마 아즈사 (손녀)
오야마 가쓰라 (손자)
와타나베 아키라 (손자)
배우자오야마 사와 (선처)
오야마 스테마쓰 (후처)
자녀차남: 오야마 가시와
기타 정보

2. 생애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도막운동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의 주요 공신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새롭게 창설된 육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1. 초기 생애

가고시마에 있는 오야마 이와오의 출생지


오야마 이와오는 사쓰마 번(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성 아래 가고시마시 가지야정 가키모토지 거리에서 사쓰마 번사 오야마 쓰나요시(히코하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와지로'''(岩次郎)였고, 통칭은 '''야스케'''(弥助)였다.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아버지 쪽 사촌 관계였다.[2] 가문 문장은 사사키 겐지 오야마 씨의 전형적인 메유이몬("둥근 모서리에 사방을 세운 4눈")이다.

같은 번 출신 아리마 신시치 등의 영향을 받아 과격파에 속했으나, 1862년 테라다야 사건 때는 공무합체파에게 진압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내져 근신 처분을 받았다.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자 근신이 풀려 포대에 배속되었는데, 이때 서구 열강의 군사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막부 신하였던 에가와 히데타츠의 학원에서 구로다 기요타카 등과 함께 포술을 배웠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제자로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도막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신 전쟁에서는 별동 제1여단을 지휘했고, 아이즈 전투에서는 삿초 동맹군 소속으로 야전 포병 부대를 이끌고 오다산 포진지를 지휘했다. 이 공성전 중 사가와 간베이가 이끄는 아이즈 측 게릴라 부대에 의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한편, 1904년경부터 미국 뉴욕주 제네시오의 템플 힐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일본 판화가 오야마 스케이치(1858-1922)와 오야마 이와오를 혼동한 지역 기록이 존재한다.[3][4]

2. 2. 보신 전쟁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야마는 신식 총 부대를 이끌고 도바·후시미 전투아이즈 전쟁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2]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제자로서 도쿠가와 막부 타도 운동에 참여하며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12도이무 곡사포와 4근 산포를 개량하기도 했는데, 오야마가 설계한 이 포들은 그의 아명인 '야스케'를 따 '야스케포(弥助砲)'라고 불렸으며, 이후 러일 전쟁 시기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20]

특히 아이즈 전쟁에서는 사쓰마 번 제2포병대장으로 참전했다. 와카마쓰성(쓰루가 성) 공격 첫날, 오테몬 앞 기타데마루에서 농성하는 아이즈 번 병력의 저항으로 도사번 부대가 고전하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이때 날아온 총탄이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어 다음 날 후송되었다. 이 때문에 오야마가 실제로 와카마쓰 성 전투에 참여한 것은 첫날 하루뿐이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오야마가 포격을 직접 지휘하거나 성을 향해 포탄을 비 오듯 쏟아부어 함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와카마쓰성의 주력 병력은 성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성 안에는 노약자와 병자, 부상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야마가 부상당한 기타데마루 전투에서 싸운 상대는 니이지마 야에(훗날 니이지마 조의 부인)와 소수의 병사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오야마를 저격한 인물이 야에라는 설도 있다. 공교롭게도 이때 성 안에는 훗날 오야마의 후처가 되는 야마카와 스테마츠와 그 가족들도 농성 중이었다.

2. 3. 유학 및 군 경력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도막운동을 벌여 메이지 유신의 주요 공신 중 한 명이 되었다.[2] 그는 보신 전쟁에서 별동 제1여단 지휘관을 맡았고, 아이즈 전투에서는 삿초 동맹의 야전 포병 부대를 지휘하던 중 사가와 간베이 휘하 부대에 의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2]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롭게 창설된 일본 제국 육군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육군의 서양화에 힘썼다. 그는 대위 시절 기미가요 가사를 일본 국가로 채택하는 데 관여했다.

1870년 프랑스의 생시르 육군 사관학교에 유학(1870년 8월 – 1871년 3월)[2]하여 당시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일본 공식 군사 참관인으로 지켜보았다. 이후 제네바에서 3년간(1871년 7월 – 1874년 10월)[2] 유학하며 외국어를 공부했고, 특히 러시아어에 능통해졌다. 유학 중 러시아의 혁명 운동가 레프 메치니코프와 알게 되었는데, 훗날 메치니코프가 도쿄 외국어학교 교사로 부임한 데에는 오야마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체류 중 루이 비통에서 여행 가방을 구매한 최초의 일본인 고객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후에는 가와카미 소로쿠와 함께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연구를 계속했다.[5]

러일 전쟁 중 원수 오야마 이와오


귀국 후에는 세이난 전쟁(사쓰마 반란)에서 정부군 지휘관으로서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1877년, 그의 친척이기도 한 사이고 다카모리사쓰마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오야마는 정부군의 공성포대 사령관으로서 사이고 군을 상대로 싸웠다. 이 일로 평생 마음에 부담을 느껴 다시는 고향 가고시마 땅을 밟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청일 전쟁(1894-1895)에서는 일본 제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2] 랴오둥 반도에 상륙한 후 뤼순을 함락시키고, 이후 산둥성으로 건너가 웨이하이웨이 요새를 점령했다.[6] 그러나 전쟁 중 발생한 포트 아서 학살 당시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미국 기자로부터 받기도 했다.[7]

청일 전쟁에서의 공로로 오야마는 화족 제도 하에서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3년 후인 1898년 1월에는 원수 계급으로 승진했다.[2] 러일 전쟁(1904-1905)에서는 만주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6], 전쟁 기간 모든 일본 육상 작전에 대한 전권을 행사했다. 그는 랴오양 전투 승리를 비롯해 사하 전투와 샌데푸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최종적으로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1905년 초 잠시 질병으로 인해 고다마 겐타로 장군이 지휘를 대행했으나, 곧 회복하여 복귀했다.[8]

러일 전쟁 승리 후, 메이지 천황1907년 9월 그에게 일본 제국 최고위 작위인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2][9]

2. 4.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청일 전쟁 (1894년 - 1895년) 직전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오야마는 육군 대장으로서 제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랴오둥 반도에 상륙하여 뤼순을 함락시키고 계속 남하하여 산둥성의 웨이하이웨이 요새를 점령하였다.[6] 이 과정에서 포트 아서 학살 당시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7]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그는 화족 제도 하에서 후작 작위를 받았다.

1898년 1월, 군대 내 최고 계급인 원수로 승진하였고,[2] 1899년 5월 16일에는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1903년 6월 22일에는 참모총장으로서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내각에 제출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 (1904년 - 1905년)이 발발하자 원수 육군 대장으로서 만주군 총사령관을 맡아 (1904년 6월 20일) 만주에서 일본 육군을 지휘했다.[6] 오야마는 전쟁 중 모든 일본 육상 작전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가졌으며, 랴오양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하 전투와 샌데푸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반격을 격퇴하는 등 주요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전쟁 후반에는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와 함께 대본영에 강화를 완곡하게 종용하기도 했다. 1905년 초 잠시 질병으로 인해 고다마 겐타로 장군이 지휘를 대행했으나, 회복하여 최종적인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다.[8]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오야마는 청일 전쟁과 함께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며, 같은 사쓰마 번 출신인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와 함께 "육지의 오야마, 바다의 도고"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독일 라이프치히의 한 신문은 니콜라이 2세가 "원숭이 같다"고 폄하했던 일본인이 단독으로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고 보아, 오야마를 오랫동안 러시아에 고통받아 온 핀란드인이라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21] 일본의 승리 후, 메이지 천황은 1907년 9월 그에게 일본 제국 최고위 작위인 공작 작위를 수여하였다.[2][9]

2. 5. 말년

여러 내각의 육군 대신참모총장을 역임한 오야마는 민주주의의 확산에 맞서 원로의 권력을 옹호했다. 그러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신중한 성격으로 정치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다.[2] 육군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최중요 중신인 원로의 일원이었으나, 육군 내의 의향을 따르는 경향이 강했으며 구로다 기요타카사이고 주도 사후에는 회의 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잠시 원로 회의 구성원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191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内大臣|나이다이진일본어으로 재직했으며,[2] 1915년 4월 23일에 정식으로 내대신으로 임명되어[22] 궁중에 들어갔다. 같은 해 11월에는 교토에서 열린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했다.[10]

1906년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 일본에서는 금계훈장 (1등)과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1916년, 다이쇼 천황을 수행하여 후쿠오카현에서 열린 육군 특별 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오던 중 위장병으로 쓰러져 담낭염을 앓게 되었다. 요양 중이던 같은 해 12월 10일, 내대신 재임 중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병상에 누워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가이 겐코가 작곡한 군가 『눈의 진군』을 들었다고 전해지며, 본인 스스로 이 곡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임종 자리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와무라 가게요시, 데라우치 마사타케, 구로키 다메모토 등 당대의 군부 실력자들이 모여 마치 원수부가 오야마 가문으로 옮겨온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은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사망 바로 다음 날이었기에, 신문 지면 대부분이 소세키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할애되어 오야마의 부고는 다른 원로들의 부고에 비해 조촐하게 다루어졌다. 이는 오야마와 다른 원로들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 12월 17일 국장에는 주일 러시아 대사와는 별도로 러시아 대사관 부속 무관 야혼토프 소장이 직접 오야마 가문을 방문하여 "전 러시아 제국 육군을 대표하여" 조사를 낭독하고 화환을 영전에 바쳤다. 과거 적국이었던 군인으로부터 이처럼 정중한 조의를 받은 인물은 오야마와 훗날의 도고 헤이하치로뿐이었다.

오야마는 덩치가 크고 과식을 즐겼으며, 몸무게가 약 95.25kg을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당뇨병과 관련된 사망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

묘소는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시에 있다. 유품 다수는 육상자위대 우쓰노미야 주둔지 자료관에 수장 및 전시되어 있다.

3. 사후

다이쇼 5년(1916년), 다이쇼 천황을 수행하여 후쿠오카현에서 열린 육군 특별 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오던 중 위장병으로 쓰러져 담낭염을 함께 앓게 되었다. 요양 중이던 같은 해 12월 10일, 내대신 재임 중 훙거했다. 향년 75세였다. 병상에 누워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가이 겐코가 작곡한 군가 『눈의 진군』을 들었다고 전해지는데, 본인이 이 곡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임종을 앞둔 자리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와무라 가게요시, 데라우치 마사타케, 구로키 다메모토원수부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마치 원수부가 오야마 가문으로 옮겨온 듯했다고 한다. 오야마의 죽음은 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사망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소세키의 죽음을 애도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했기에, 오야마의 부고는 다른 원로들의 부고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조촐하게 다루어졌다. 이는 오야마와 다른 원로들 사이의 차이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일화가 되었다.

장례는 12월 17일 국장으로 치러졌고, 사후 차남 가시와가 뒤를 이어 공작위를 계승했다. 국장에는 주일 러시아 대사가 참석한 것과 별개로, 러시아 대사관 부속 무관 야혼토프 소장이 직접 오야마 가문을 방문했다. 그는 "전 러시아 육군을 대표하여" 조사를 낭독하고 눈에 띄는 화환을 직접 영전에 바쳤다. 과거 적국의 군인에게서 이처럼 정중한 조의를 받은 것은 오야마와 훗날의 도고 헤이하치로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묘소는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시에 있다. 유품 다수는 육상자위대 우쓰노미야 주둔지에 소장되어 있으며, 주둔지 내 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4. 가족 및 친족



바사 칼리지 재학 시절의 오야마 스테마쓰


오야마 이와오는 가고시마의 사쓰마 번 소속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아버지 쪽 사촌 관계였다.[2] 그의 아버지는 오야마 츠나마사(大山綱昌), 어머니는 쿄코(大山綱毅의 딸)이다. 형 오야마 나루미(大山成美)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여동생 안(安)과 결혼했고, 남동생 오야마 세이노스케(大山誠之助)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딸 사이고 기쿠소(西郷菊草)와 결혼했다. 오야마 츠나요시(大山綱良)와는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다.

오야마의 첫 번째 부인 사와(澤)는 백작 요시이 도모미(吉井友実)의 장녀였으나, 산욕열로 일찍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야마카와 스테마쓰(山川 捨松)'''이다. 스테마쓰는 아이즈 번의 가로였던 야마카와 히로시(山川浩)와 야마카와 겐지로(山川健次郎)의 여동생으로, 아이즈 전쟁의 생존자였다. 그녀는 1870년대 초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파견된 최초의 여성 유학생 중 한 명으로, 11년간 미국에 머물며 1882년 바사 칼리지를 졸업하여 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일본 여성이 되었다.[11] 귀국 이듬해인 1883년, 과거 보신 전쟁 당시 적대 관계였던 사쓰마 번 출신의 오야마 이와오와 결혼했다.

오야마는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으나, 차녀 미츠코(みつ子)는 요절했고 육녀 나가코(なが子)는 유산되었다.

  • 전처 사와(澤)와의 자녀:
  • 장녀 노부코(信子): 자작 미시마 야타로(三島彌太郎)와 결혼했으나, 폐결핵 발병 후 1년여 만에 이혼했다. 소설 『부여귀』(不如帰)의 여주인공 나미코(浪子)의 모델로 알려져 있으며, 1896년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6]
  • 차녀 미츠코(みつ子): 요절.
  • 삼녀 후요코(芙蓉子): 호소카와 준지로(細川潤次郎)의 장남 호소카와 이치노스케(細川一之助)와 결혼했다.
  • 사녀 토메코(留子, 1882-1973): 백작 와타나베 치아키(渡邊千秋)의 차남이자 후계자인 와타나베 치하루(渡邊千春)와 결혼했으나 1918년 사별했다. 사사키 노부츠나(佐佐木信綱)에게 와카(和歌)를 배웠으며, 와타나베 토메코(渡邊留子), 타케시마 키미코(竹島きみ子)라는 이름으로 가집(歌集)을 출판하고 여성 문예지 『불의 새』(火の鳥)를 창간하는 등 문학 활동을 했다.[47]

  • 후처 스테마쓰(捨松)와의 자녀:
  • 장남 타카(高): 해군병학교 제35기로 해군 소위 후보생이었으나, 1908년 연습함으로 사용되던 순양함 마츠시마의 폭침 사고로 순직했다.
  • 오녀 히사코(久子): 남작 이다 이와쿠스(井田磐楠)와 결혼했다.
  • 육녀 나가코(なが子): 유산.
  • 차남 카시와(大山柏): 육군에서 복무한 후 은퇴하여 고고학자가 되었다.[18]


1901년, 황실 관례에 따라 훗날 쇼와 천황이 될 어린 황손의 양육 책임자 후보로 오야마가 처음 지명되었으나, 그는 이를 고사했고 결국 가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 백작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12]

한편, 적어도 1904년부터 미국 뉴욕주 제네시오 지역 기록에는 오야마 이와오가 템플 힐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일본 판화가 오야마 스케이치(小山 スケッチ, 1858-1922)와 혼동되어 기록된 사례가 있다.[3][4]

'''오야마 이와오 가계 요약'''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오야마 츠나마사 (大山綱昌)
어머니쿄코 (大山綱毅의 딸)
오야마 나루미 (大山成美)아내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여동생 안(安)
남동생오야마 세이노스케 (大山誠之助)아내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딸 기쿠소 (西郷菊草)
사촌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주도
전처사와 (澤)요시이 도모미 (吉井友実) 백작의 장녀, 사별
후처스테마쓰 (山川 捨松)야마카와 히로시·야마카와 겐지로의 여동생, 일본 최초 여성 학사 학위자
자녀이름생모비고
장녀노부코 (信子)사와 (澤)미시마 야타로 (三島彌太郎) 자작과 결혼 후 이혼, 소설 『부여귀』 모델, 요절
차녀미츠코 (みつ子)사와 (澤)요절
삼녀후요코 (芙蓉子)사와 (澤)호소카와 이치노스케 (細川一之助)와 결혼
사녀토메코 (留子)사와 (澤)와타나베 치하루 (渡邊千春)와 결혼 (사별), 문학 활동
장남타카 (高)스테마쓰 (捨松)해군 소위 후보생, 순양함 마츠시마 폭침 사고로 순직
오녀히사코 (久子)스테마쓰 (捨松)이다 이와쿠스 (井田磐楠) 남작과 결혼
육녀나가코 (なが子)스테마쓰 (捨松)유산
차남카시와 (大山柏)스테마쓰 (捨松)육군 복무 후 고고학자 활동


5. 평가 및 논란

여러 내각에서 육군대신참모총장을 역임하며 원로(元老)의 권위적인 권력을 옹호하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경계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정치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191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내대신으로 재직했으며,[2] 이 직책으로 1915년 11월 교토에서 열린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했다.[10]

청년기에는 총명하고 날카로운(俊異) 면모를 보였으나, 장년 이후에는 너그럽고 대범한(茫洋) 풍격을 갖추려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 러일 전쟁사하 전투에서 고전하며 총사령부의 분위기가 험악해졌을 때, 낮잠에서 깬 오야마가 "고다마 씨(고다마 겐타로 참모장), 오늘도 어디선가 전쟁(いくさ)이 벌어지고 있는가?"라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날카로운 면모는 여전히 남아 있어, 고다마 겐타로 참모장이 뤼순의 제3군을 격려하러 간 사이 오야마가 직접 참모 회의를 주재하며 적극적으로 작전을 지휘했다는 기록도 있다.

덩치가 크고 과식을 즐겼으며, 몸무게가 약 95.25kg을 넘어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916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10]

동시대 인물들은 오야마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남겼다.


  • 오쿠마 시게노부: "상식에 매우 뛰어나고, 결코 세상의 상상과 같이 세상일에 어두운 한낱 무인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공은 이와 같이 독락독신을 숭상하는 군자의 모습이 있으나, 나아가 적극적으로 악을 배척하고 선을 행하는 듯한 언행에는 이르지 못한다. 결국 공은 한 사람의 군자였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침묵하고 과묵함으로 인해, 혹 막연하여 파악할 수 없는 듯 해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총명함과 사물의 추이를 통찰하고, 대국의 귀추를 달관하는 명철함에 이르러서는 실로 경복하지 않을 수 없고, 더욱이 묵묵한 사이에 사람을 보는 혜안은, 공을 아는 자가 외경을 멈추지 못하는 바이다."
  •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隆盛)옹(사이코 다카모리)은 사람을 알고 맡기고, 오야마는 사람을 보고 맡긴다. 둘 다 훌륭하다."
  • 히지카타 히사모토: "덕이 높은 지극히 소박한 대해와 같은 대량의 인물이었다. 아랫사람으로 쓰이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경복,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마디로 평하면 장차 장군이 될 대장군이었다. 이런 인물은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다. 즉 국보라고 말해야 할 인물이다."
  • 가쓰라 다로: 오야마가 참모총장 시절 고다마, 가와카미 소로쿠, 가쓰라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중재했으며, 모두 그의 결정에 따랐다고 회고했다. 또한 "오야마 씨의 훌륭한 점은 오야마 씨의 부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가와무라 스미요시: "장년 시대부터 역시 살이 쪄 있었지만, 술도 담배도 일절 하지 않고, 매일의 기거 동작은 모두 군대식으로 매우 절제하는 사람이었다. 한때 저택 안에 당구대를 설치한 적도 있지만, 유희에 탐닉하는 일은 결코 없다. 과묵한 듯하지만, 저런 모습으로 꽤나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미있는 농담을 하곤 했다."[67]
  • 가바야마 스케노리:
  • "오야마와 나는 메이지 12, 3년부터의 지인으로, 지도와 오야마, 나 셋은 둘도 없는 사냥 친구였다. 이 셋은 밥보다 사냥을 좋아해서, 매주 토요일부터 일요일에 걸쳐 묵으면서 우라와 호도가야 구마가야 방면으로 꿩 사냥을 나간다. 오야마가 가장 튼튼한 다리로, 아침 어두울 때부터 산에 가면 점심 전까지는 한숨도 쉬지 않고 새를 쫓아다니며, 전혀 지친 기색도 없다. 그 대신 밤에는 누우면 천둥과 같은 큰 코골이로, 오야마 옆에 자면 잠들 수가 없다. 지도는 사람이 나쁘기 때문에 가바야마는 가운데 자라고 말하고, 자신은 가능한 오야마에게서 먼 쪽에 자거나 했다."[68]
  • "어느 날 밤 하토가야에 묵었는데, 옆방에서 다섯, 여섯 명의 손님이 기생을 불러 큰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과연 오야마도 잠을 잘 수 없어서 발끈하여, 숙소의 여종을 불러 안면 방해라고 불평을 한다. 여종이 옆방에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러 가지만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는다. 오야마는 두세 번 여종을 심부름 보냈지만 효과가 없다. 밤 1시경에도 아직 한창 시끄럽다. 오야마도 참을 수 없었던지 일어나서 총을 탕탕 쏘아댔다. 옆방의 손님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기생들도 손님들도 갑자기 조용해졌다."[69]
  • "오야마가 경시총감이 되었을 때, 호도가야였던가, 세 사람이 찻집에 올라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밖에 매어 놓은 오야마의 개가 지나가는 순경에게 짖으며 바지를 물었다. 숙소의 여자가 나와 사과를 했지만 순경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의 주인을 나오라고 한다. 그러자 오야마가 굽실굽실 사과하며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순경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명함을 내놓으라고 끝까지 승낙하지 않는다. 오야마도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경시총감이라고 적힌 명함을 내놓자, 순경은 펄쩍 뛰며 놀라고, 이제는 지위가 전도되었다. 순경은 평거미처럼 엎드려 무례를 사과한다. 그리고 경찰 서장이 와서 사죄하는 등, 이런 우스운 일도 있었다."[69]
  • 이시구로 다다노리:
  • "공작은 결코 재치를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즉, 지혜라는 것을 완전히 초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언뜻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지만, 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공의 본령은 물론, 군장으로서 삼군을 호령하는 데 있었지만, 한편 정치도 이해하고 경제에도 통달하여, 팔방미인의 큰 재능이었다."[70]
  • 후쿠시마 야스마사: "저런 훌륭한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다. 산이 무너져도 땅이 갈라져도 끄떡없는 저 큰 점은 진실로 천하의 진귀한 보물이며 국가의 주춧돌이다. 공은 중정(中正)하고 청렴하며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않는다. 사쓰마 사람이면서 사쓰마 편을 들지 않고, 사당(私黨) 사파(私派)를 만드는 것을 절대 하지 않는다. 사생활상 아무런 비난의 여지가 없는 훌륭한 사람으로, 특히 예양(禮讓)의 덕이 풍부하여 상대가 훌륭한 사람이든 범인이든 그 태도에 조금의 차별도 없다."
  • 도쿠토미 소호:
  • "공의 지혜는, 스스로 사사로운 소지(小智)가 아니라, 천하의 대국(大局)을 다루는 대지(大智)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어도, 그 어리석음에는 미칠 수 없다고 했다. 어리석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다만 우리 오야마 공에게서 그에 가깝다. 공의 지혜는 대세를 보는 데 뛰어나고, 사람을 감별하는 데 뛰어나며, 특히 스스로 처신하는 데 뛰어나다. 공은 어떤 의미에서 개인주의자이다. 두목도 없고, 부하도 없다. 따라서 번벌심(藩閥心)도 없고, 당벌심(黨閥心)도 없다. 그러나 또한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위대한 개인주의자이다."
  • "오야마 공은 매우 공평한 사람으로 번벌 정신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즉, 특별히 부하를 기르거나 아군을 만들거나, 혹은 당파를 조직하는 등 하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항상 혼자 서서 당당하게 천하를 관철했다. 이 점은 현대인과 상당히 조화가 다르다."[71]
  • "오야마 공은 또한 검소하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그와 같은 고위 고관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교만하고 사치스럽게 굴거나 뇌물을 받는 일 등은 더더욱 없었다. 그의 오다의 집을 지을 때도, 그 목재는 나스의 자신의 산림에서 베어 온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 등을 받았을 때도, 가령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하나 그에 상당하는 답례를 했다."[72]
  • 요시다 기요히데:
  • "(소년 시대의) 오야마 공은 지금처럼 살이 찌지 않고 말라서 가난한 모습이었다. 특히 공은 집안에서도 평판이 좋은 창술가로, 뜰에서 창술 연습을 하는 것을 잘 보았다. 이 무렵의 무사의 학문이라고 하면 경서와 겐페이 이후의 군서였지만, 오야마 공이 좋아하고 특기로 하는 것은 겐키 덴쇼의 군서 중에서도 다케다 삼대기, 사나다 유키무라 등으로, 모두 이를 암송하여, 다케다 삼대기의 몇 권째라고 하면 목소리에 맞춰 허공에서 읽었다. 뛰어난 기억력에 감복했다."[73]
  • "지금에 와서야 저렇게 원만하게 보이지만, 오야마 공의 젊은 시절은 지도 씨를 능가하는 말썽꾸러기였고, 호담하고 과감한 엉뚱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민첩하고 기략에 풍부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그 민첩함도 기략도 안에 감추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 사람이 파리에서 돌아온 메이지 초년 무렵은 일본 제일의 하이칼라로 가치야 정 시대의 반골 야스케 돈과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74]
  • 스에마쓰 겐초: "오야마 공의 인물은 다른 사쓰마의 호걸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사무의 재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만사는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사람의 수장에 적합했다. 내가 일찍이 서생 시절에 후쿠치 오치 거사가 '오야마 씨는 바보 같은 사람이지만 사실 이 바보 같은 성격으로 성공할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였다. 공은 대의에 따라 단연코 오니시고와 포연(砲煙) 속에 서로 마주하는 듯했다. 공은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실로 일낙천금(一諾千金)의 사람이었다. 공의 국가에 대한 방침은 오쿠보 공과 상균하여, 그 때문에 오쿠보 공도 공을 간파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군대를 주어 전장으로 가게 했다. 이와 같이 대의명분을 위해 몸을 처신한다는 공의 대의점에 비하면, 사무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등 하는 것은 논할 가치도 없다."[75]
  • 요시다 모야: "전하께서는 이 땅(오야마 개척지)에 나오시면 반드시 자를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 손을 뻗어 나무를 어루만지며 '너는 커졌구나, 작년보다 조금 커졌네'라고 자를 대고 나무와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농장을 무엇보다 좋아하여 이곳에 묘지를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76]
  • 나카니시 기미오: "눈물이 많은 분으로, 다나카 로쿠베에 씨의 별장에서 연회가 있었을 때, 산유테이 엔초의 인정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결국 콧물을 흘리셨습니다."[77]
  • 조르주 델라 파이유 드 레버르겐 (벨기에 공사): "공은 항상 우리 외국인에게 접하여, 유쾌한 인상을 주었다. 궁중 등에서 야마가타 공과 오야마 공을 만났을 때의 인상을 구분하면, 야마가타 공은 이쪽에서 질문이 있으면 대답하겠다는, 매우 엄격한 풍의 분이라고 생각되지만, 오야마 공은 뭔가 화제를 만들어 이야기를 걸려고 하는 모습이 분명히 보이는, 아주 평민적인 분이었다. 공작 저택에 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공작은 외국에 관한 일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공작이 외국 서적이나 외국 이야기에 시종 주의를 기울이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해서 공연히 외국 이야기를 하고 그 지식을 나타내려 하는 분이 아니라, 때때로 매우 평이한 이야기도 있고, 어떤 때는 공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전원 생활로, 자연만큼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니코 미리아레시 (그리스 군사 통신원): "원수도 나이를 먹으면서 꽤나 머리가 낡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제 독일에 다녀온 신참 장교를 만나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의 의견보다 오히려 노원수의 의견이 신식이고, 또한 훨씬 더 정곡을 찌르는 것에 놀랐습니다. 저는 노원수는 선천적인 군인으로 군인 중에서는 드문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개선했을 때 아들 카시와가 전쟁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자, "젊은이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알고 있는 것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고 답했는데, 이는 그의 '너그러움(茫洋)'과 '날카로움(俊異)'을 동시에 보여주는 면모로 해석되기도 한다.[48]

1906년에는 영국에드워드 7세로부터 메리트 훈장을 받았으며, 일본에서는 금계훈장(1등)과 국화대수장을 수훈했다.

5. 1. 한국과의 관계

(내용 없음)

6. 기타

오야마는 여러 유럽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글을 쓸 수 있었으며, 유럽식 건축물도 좋아했다. 그는 육군 대신 재임 기간 동안 독일식 성을 본떠 도쿄에 대저택을 지었다.

그는 설계에 매우 만족했지만, 부인 스테마쓰는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일본 문화를 잊지 않도록 아이들 방을 일본식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이 집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파괴되었거나, 제2차 세계 대전미국의 공습으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869년, 당시 요코하마에서 어용 외국인(o-yatoi gaikokujin)으로 일하던 영국 군악대 지휘자 존 윌리엄 펜턴은 일본 군악대원들에게 영국 국가 "신이여, 국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King)"에 대해 이야기하며 일본에도 이와 유사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군악대원들은 일본어한문에 능통한 포병 대위 오야마 이와오에게 적절한 가사를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고, 오야마는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로 사용될 시를 선택했다.[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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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大山巌関係文書(寄託) {{!}} 憲政資料室の所蔵資料 {{!}} 国立国会図書館 https://rnavi.ndl.go[...] 2020-03-25
[3] 서신 Personal letter Livingston County Historian's Office, Mt. Morris, New York 1913-07-10
[4] 뉴스 Classmate of Field Marshall http://www.newspaper[...] 2024-03-25
[5]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Military Biography
[6] 백과사전 Oyama, Iwao, Prince
[7] 서적 The War in the East https://archive.org/[...] J. H. Moore and Company 2011-08-09
[8]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The Scarecrow Press
[9] 문서 Portraits of Modern Historical Figures National Diet Library
[10] 백과사전 Iwao, Ōyama https://archive.org/[...]
[11] 뉴스 Prince Iwao Oyama Is Dead in Japan The New York Times 1916-12-11
[12] 서적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Perennial
[13] 문서 The Wife of Japan's great General Oyama
[14] 웹사이트 Japan searches for Scot who modernised nation http://thescotsman.s[...] Published by Johnston Press Digital Publishing 2007-12-10
[15] 뉴스 The London Gazette http://www.london-ga[...] 1906-05-15
[16] 웹사이트 Oyama, Lake Country, Okanagan Valley, BC http://vancouverisla[...] vancouverisland.com 2012-04-13
[17] 서적 People Places: Contemporary Saskatchewan Place Names 2003-10
[18] 웹사이트 大山氏 https://reichsarchiv[...] 2019-01-05
[19] 서적 貴族院要覧(丙) 1946-12
[20] 뉴스 青鉛筆 朝日新聞 1976-10-13
[21] 논문 20世紀初頭のライプチヒ-植物学者大野直枝のドイツ日記 https://tezukayama.r[...] 帝塚山大学人間環境科学研究所
[22] 관보 官報 1914-04-23
[23]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大山巌
[24] 관보 官報 1886-10-20
[25] 관보 官報 1895-12-21
[26] 관보 官報 1916-12-11
[27] 관보 官報 1884-07-08
[28] 관보 官報 1889-11-30
[29] 관보 官報 1890-01-27
[30] 관보 官報 1895-08-06
[31] 관보 官報 1896-04-01
[32] 관보 官報 1898-01-21
[33] 관보 官報 1906-12-30
[34] 관보 官報 1907-09-23
[35] 관보 官報 1916-12-13
[36] 간행물 官報 第1187号「叙任及辞令」 1916-07-15
[37] 간행물 官報 号外「勅令」 1916-12-11
[38] 간행물 官報 第1311号「故大山内大臣葬儀」 1916-12-14
[39] 간행물 官報 第178号「賞勲叙任」 1884-02-05
[40] 간행물 官報 第482号「賞勲」 1885-02-12
[41] 간행물 官報 第2350号「叙任及辞令」 1891-05-04
[42] 간행물 官報 第2372号「叙任及辞令」 1891-05-29
[43] 간행물 官報 第6828号「叙任及辞令」 1906-04-07
[44]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元帥陸軍大将侯爵大山巌外二名外国勲章受領及佩用ノ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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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서적 武勲大山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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